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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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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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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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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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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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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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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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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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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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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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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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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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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https://sum.su.or.kr:8888/bible/today
성서유니온선교회
sum.su.or.kr:8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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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에 대한 오해를 넘어: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한 부활의 역설
1. 도입: 닫힌 문이라는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뜻밖의 방문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빗장은 때로 육신의 문보다 견고합니다. 스승의 죽음 이후 제자들은 유대인 당국자들의 박해를 피해 집 안의 모든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그 폐쇄적인 공간,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절망의 한복판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요한이 이 장면에서 강조하는 핵심은 이것이 단순한 방문이 아닌 '기적'이라는 점입니다. 물리적 벽이 더 이상 제약이 되지 않는 부활체의 신비는, 공포에 질려 있던 제자들에게 그 어떤 논리보다 강력한 소망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2. 반전 1: 부활 신앙, 개인적 위로를 넘어 '선교적 권세'로의 확장
예수님이 부활의 몸으로 나타나신 목적은 단순히 생존을 확인시켜주는 안부 인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명확한 '사명 부여'를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 선언하시며, 당신의 권위를 제자들에게 계승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신학적 지점을 마주합니다.
첫째는 성령 수여의 성격입니다. 본문(요한복음 20:22)에서 주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것은 외적 권능을 입는 오순절 사건과는 구별됩니다. 이는 내면의 기쁨과 근본적 변화를 약속하신 이전 말씀(요한복음 7:39)의 성취이며, 부활을 목격한 자들이 누리는 '내적 변혁의 영'입니다.
둘째는 '죄 사함의 권세'입니다. 마태복음에서의 이 권세가 교회의 징계나 행정적 권한과 연결된다면, 요한복음에서는 철저히 '선교'와 맞닿아 있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부여된 권세는 복음을 통해 타인을 생명의 길로 초대하거나,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 결과를 알리는 '복음 전파의 전권'을 의미합니다. 부활 신앙은 이렇듯 사적인 감격을 넘어 세상을 향한 파송으로 완성됩니다.
3. 반전 2: 우리를 대변하는 가장 정직한 제자, 도마
기독교 역사 속에서 도마는 늘 '의심'이라는 부정적인 프레임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텍스트를 면밀히 살피면 이는 다분히 억울한 평가입니다. 사실 부활의 현장에서 주님의 상처를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부활을 믿었던 제자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도마는 유독 의심이 많았던 것이 아니라, 단지 첫 번째 현장에 없었을 뿐이며 우리와 똑같이 '증거'를 원했던 정직한 구도자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도마를 비난하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와 동일한 평강을 비추십니다. 이에 도마는 요한복음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밀도 높은 신앙의 정점을 터뜨립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이 고백은 도마가 더 이상 육안의 증거에 매몰되지 않고, 부활의 주님을 우주의 통치자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직접 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후대 그리스도인들, 즉 '제2세대'를 대변하며 우리를 신앙의 깊은 지평으로 인도하는 다리가 됩니다.
4. 반전 3: 보지 못하고 믿는 이들을 향한 성령의 응원
도마의 고백 뒤에 이어진 예수님의 말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는 선언은 시대를 관통하여 오늘날의 우리에게 닿습니다. 직접적인 육체적 대면 없이도 주님을 고백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은 그것이 '보혜사 성령'의 도움으로 가능하다고 역설합니다.
성령은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 부활의 사건을 오늘의 사건으로 현재화합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신앙을 견인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 자체가 이미 그 안에 '더 큰 복'을 내포하고 있다는 이 역설은, 시각적 자극에 매몰된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영적 통찰이 무엇인지 일깨워줍니다.
5. 결론: '믿음'의 시제가 '생명'의 역동이 될 때
요한복음의 말미에서 저자는 이 기록의 목적을 명시합니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이 책의 성격을 다층적으로 보여줍니다. 만약 이를 '부정 과거(Aorist)' 시제로 본다면 아직 믿지 않는 이들이 믿음을 갖게 하려는 '선교적 목적'이 강조되고, '현재(Present)' 시제로 본다면 이미 믿고 있는 이들이 그 믿음을 지속하게 하려는 '목회적 목적'이 부각됩니다.
결국 요한복음은 불신자에게는 신앙의 결단을, 신자에게는 주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을 독려하며 그 모든 과정의 끝에 '생명(Zoe)'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얻는 이 생명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역동입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사라진 자리에서 비로소 피어난 당신의 믿음은, 오늘 당신의 삶 속에서 어떤 생명력으로 숨 쉬고 있습니까?
#큐티에이드(4월 6일)
1. 오늘의 본문 : 요한복음 20:19-31
(말씀을 찾아 읽고, 묵상합니다.)
2. 내용 이해 : 부활하신 날 저녁 두려움에 숨어든 제자 공동체 안으로 예수가 찾아오신다. 손과 옆구리를 보이며 부활하신 사실을 믿게 하신다. 평안을 전하시며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신다.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다. 나중에 합류한 도마는 직접 상처를 만져 보지 않고서는 절대 믿지 않겠다고 한다. 여드레가 지나 다시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부활의 예수가 들어 오신다. 그제야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3. 배경 이해 : 부활하신 예수의 출현 이야기에서 요한의 초점은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를 믿는 것에 있다. 저자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 열 제자, 그리고 도마가 차례로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제자가 누구인가?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자들이다. 그들이 세상에 보냄 받는 목적과 증언의 대상도 예수다.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예수를 믿어 생명 얻게 하는 일로 보냄을 받는다. 요한의 기록 목적이 자연스레 연결되는 이유다.
4.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 부활 후 찾아오셔서 평안의 인사를 전하시는 예수님
- 부활의 의미를 모르는 제자들은 여전히 두렵다.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문을 잠근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런 예수께서 나타나 평안(샬롬)의 인사를 건네신다.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부활만이 우리에게 참된 평안(샬롬)을 준다. 부활이 확인되자 제자들의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뀐다. 참 평화의 시작은 부활이다. 부활이 새 창조의 첫날을 열었기 때문이다. 부활로 인해 하나님 없는 인류의 사망과 두려움이 빛과 생명 가득한 샬롬으로 변했다.
* 자신의 몸을 만져보게 하시는 예수님
-부활의 예수를 만나지 못한 도마는 동료 제자들의 부활 증언을 믿지 못했다. 그만 의심이 많았던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도마에게도 나타나 자신의 몸을 만져 보고 믿으라고 도전하신다. 도마는 그제야 만져 보지도 않고서 예수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부활을 믿는다. 하지만 예수는 이제 자신이 승천한 후에는 부활의 몸을 직접 보고 믿을 수 없으니, 보지 않고도 증인들의 증언이나 기록만 보고도 믿는 자가 복될 것이라고 하신다.
5. 내게 주시는 교훈
*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믿음은 봄날같이 신비롭다.
- 꿈쩍도 안 할 것 같던 겨울을 보내고 연한 잎 싹 틔운 봄을 맞는다. 꽃 필 수 있을까, 의문하던 계절을 건너 꽃 피운 세상, 봄. 어느 시인 말대로 '이 환장할 봄날'이다. 죽었던 것들이 다시 살아나는 자리마다 '이 환장할 봄날'이 있다. 생명이 깃든 자리마다 다 그렇게 신비롭다.
- 십자가, 그 신비로움 : 문을 걸어 잠근 제자들, 두려웠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는 두려움이 되었다. 두려움 앞에 내미신 '손'과 '옆구리'는 십자가 흔적이다. 버림받고 저주받은 흔적이 기쁨이 되는 이야기. 아픔을 아픔으로만 두지 않고 그 아픔을 기쁨으로 안아 주는 이야기. 십자가는 신비한 이야기다.
- 부활, 그 신비로움 :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이야기만 어려운 게 아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더라는 이야기도 어렵다. '손가락을 못 자국에,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도무지 풀 수 없는 꼭 잠긴 의심. 그 열쇠를 풀어 '나의 주님'과 '나의 하나님'을 고백하게 하는 부활의 이야기가 신비롭다.
- 믿음, 그 신비로움 : '보았다'는 증언이 그냥 믿음이 되는 건 아니다. '보았다' 해서 믿음을 '다'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본' 믿음이 두고두고 이어질지 장담할 수도 없다. 보고도 어려운 게 믿음이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라니. 어디에 그런 믿음이 있다면, 그건 설명이 무색한 신비다.
"대답할 수 있는 것보다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것을 '신비'라고 부른다"더라. 설명으로 다 풀기 어려운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믿음. "성령을 받으라!" 봄의 신비처럼 '훅' 불어 넣으신 것으로 신비가 생명이 된다. 살아가는, 살아나는 모든 것들의 자리에 신비로움이 있다.
6. 오늘의 키워드
#불안속방문 #부활의평안
#보지않고믿는믿음
#의심에서고백으로 #십자가의신비
7. 큐티 제목 : 봄날 같은 신비로움
8. 기도
주님, 두려움 속에 문을 닫고 있는 제 마음에도 찾아오셔서 참된 평안을 주옵소서.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을 주시고,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삶으로 살아내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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